구원간증(박**형제)

안녕하십니까! 박** 형제입니다.

2주 전에 강단에 서는 것을 제안 받았었는데, 계산을 해보니, 공교롭게도 제 생일 다음 날이더라고요. 신기하죠? 웬만하면 다음 기회에 강단에 서겠다고 하고 싶었는데, 제 생일에 맞춘 날짜가 너무 기가 막혀서 거부할 수 없어 이렇게 자리에 섰습니다. 더 나이를 먹어갈수록 생일에 대한 철없던 기쁨 보다는, 한 생명의 탄생에 따르는 수고들이 더 먼저 떠오르는 나이가 시작 된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날 부모님의 수고와, 거듭나기까지 보살폈던 교회의 수고. 주님은 아직까지도 가정과 교회를 동원해 그 눈길을 거두지 않고 계십니다.

어느 덧 분당북부교회에서만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간 중간 많은 아쉬운 이별들이 있었고, 새로운 교회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간증을 들어보지 못한 성도님들이 꽤 많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생일에 맞춰 거듭난 간증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은 참 다양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간증이 각양각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알맞게 다뤄 가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찾게 되고 또 관계를 맺게 된 결정적인 시작점은, 두 번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사진1)

할머니 강복녀

어머니와 기도하는 손 모양은 비슷하지만 대상은 확연히 다릅니다.

저희 아버지가 10살 되던 해에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80평생을 홀몸으로 아들을 키워 오셨던 할머니의 평생 친구는 궐련이었습니다. 그 텁텁한 맛으로 설움을 삼켜오시던 할머니는 결국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흐른 후, 제가 10살 되던 해, 초등학교 3학년 가을 중순 즈음, 평생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쟁이 며느리에게 호되게 시집살이만 시켜오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저는 할머니의 고요한 임종을 아버지 뒤에서 몰래 훔쳐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오랜 기도 덕분에 할머니는 다행히 임종 전에 회심하시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서 저희 가족의 구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만, 이 이야기를 하자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새벽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할머니는 짧은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고요하던 그 날의 풍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알 수 없는 슬픈 표정 뒤로 그게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너무 어려서 몰랐던 저는 그저 ‘죽음’이라는 낯선 풍경을 마주한 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저는 친구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은 왜 죽는 걸까? 어차피 죽을 건데 왜 태어나지?”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이런 기막힌 질문을 했다는 게 어이없지만, 그만큼 그 어린아이에겐 할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사실이 큰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죽음은 제가 자라온 삶의 구석구석에서 계속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 할머니,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결국은 돌아가셨구나……’

‘고생하면서 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할 텐데, 사람은 왜 태어나는 것일까?’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는 걸 알 텐데, 왜 그리 다들 살아가는 것일까?’

‘죽음이 무섭긴 한데, 할머니처럼 마치 잠자는 것같이 고요하게 맞이하는 게 죽음이라면, 정말 편하겠다.’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제 머릿속을 꽉 채운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진2)

야식으로 치킨을 배달시켰는데, 치킨은 오지 않고, 오토바이 공회전 소리만 저~골목 끝에서 한참 들려왔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갔는데, 치킨 집 아저씨는 넋이 나간채로 건너편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경찰들이 범인을 제압하고 체포하느라 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동네 대로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그 피해자는 이미 숨져 옆에 누워있었습니다. 생판 모르던 사람과 호프집에서 시비가 붙어 벌어진 어이없는 살인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그 웅크린 채 숨져있던 피해자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밤새 두려웠고, 결국 그 날, 치킨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목격한 두 번째 죽음이었습니다.

그 이후, 또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세상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참 많을 텐데……’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죽음’ 이라는 주제에 옥신각신 자기 생각을 덧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다 이야기의 끝은 하나같이 “죽으면 끝이지……” 하고 결론지었습니다. 저도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이기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습니다.

어느 날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편안해 보였던 할머니의 죽음이 떠올라 한번 따라해 보고 싶었습니다. 할머니를 염하던 모습처럼 반듯하게 누워 손과 발을 모으고 눈을 감고 숨을 참았습니다. 몽롱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우주공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그런대로 편안했습니다. ’이런 것이 죽는 거라면 참 편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 머릿속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이렇게 죽으면 난 어디로 가지?”였습니다. 분명 끝이라고 믿었었는데, ‘다음은 어디로 가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는 게 소름끼쳤습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사실이 너무 막막하고 무서웠습니다.

마치 영화 그래비티에서, 주인공이 끝도 없는 우주공간을 어지럽게 빙빙 돌며 헤맸던 것처럼, 평온한 우주는 온데 간 데 없고, 어둡고 막막한 허공 속에서 거할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묻어두었던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막 쏟아졌습니다.

- 사람은 결국 끝을 맞이할 텐데, 왜 우리는 부단히, 성실히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 잠깐씩 누리는 행복감을 위해 산다면, 그 긴 인생의 고통은 굳이 감내할 이유가 있을까?

- 죽는 게 끝이라면, 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과 가족들은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할까?

- 그렇다면 왜 용서하고 살아야 하지?

- 저 억울함을 풀기 위해 끝까지 기를 써서 복수를 이뤄내야만 하는 게 아닐까?

- 그리고 그것이 옳다! 라고 사회가 말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 우리의 삶을 누군가가 평가하지 않는다면,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자살하는 사람들은 우연히 주어졌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끝맺음을 하는데, 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며 슬퍼할까?

- 죽으면 끝인데, 가족, 도덕, 윤리, 선행, 사랑, 우정, 가치, 관계 모든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은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우리는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도 사랑이, 우정이, 관계가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다고 배우고 있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관계에 대해 배우면서도, 사람이 태어난 목적이나 의미는 아무 교과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양심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남원교회 (현 남원서문교회) 복음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설교 말씀 중에 히브리서와 로마서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사진3)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 죽음이 인간에게 도래했으며, 그 죽음을 누군가가 정했다고 한 표현과 삶을 평가하겠다는 표현이 그동안의 궁금증에 대한 답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게 답을 찾고 행복해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에 성경은 봤지만,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확률을 따졌고, 예수님을 아는 척은 했지만, 그분의 본심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피하는 방법을 찾고자 종신보험을 드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았습니다.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한번은 학생부 교사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형진아, 너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배워온 지식들이 머릿속에 있으니, 그 정도의 대답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죠!”

그러나 그 교사 형제님은 잠시 절 바라보시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너의 죄 때문이야.”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발가벗겨진 채로 하나님 앞에서 선 것 같았습니다. 분명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를 굴려 나의 떳떳함을 확증하기 위해 애써보았지만, 그럴수록 말 못할 죄들이 떠올랐고, 또 죄를 짓고 있는 저를 발견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우리의 죄’라는 말에서 정작 ‘나’는 제외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그저 ‘천국 가는 티켓‘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들을 기꺼이 내어 준 위대한 사랑도, 천국 가는 수단으로 이용해먹기에 충분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주인 없이 살아온 삶, 그 자체가 죄였다는 것을 전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던 아담, 제 뜻대로 행했던 야곱, 후회하던 삼손,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의 이야기들이 왜 저의 과거인 것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을까요?

요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자기 앞에 나오시는 것을 보고 외쳤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던 말이 저를 향해 외치는 말처럼 가슴 아프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 알아가게 된 하나님은 그 전과는 달랐습니다. 아들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양처럼 제 갈 길로만 다녔던 삶이 부끄러웠습니다.

최근 가정모임에서 마태복음을 나누다가 한 성도님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복음서에는 많은 병자들이 나오는데, 그 병자들은 불편함과 부당한 처우 속에서 그 누구보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묵상했을 거라는 겁니다. 곱씹고 곱씹어 봐도 그 끝엔 죽음밖에 없다면 그 두려움은 어떨까요?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인간의 묵상의 주제는 ‘죽음’일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더군요. 비록 몸은 성했지만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나의 죽음을 묵상했고 어릴 때부터 조숙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죽음에 대해 조금 일찍 두려움을 느낀 반응들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주님은 그 병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자신을 보이신 후, 주인 없이 사는 삶을 조명해주셨습니다. 그저 죄송하고 또 죄송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실까요. 저는 아직도 그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제는 생일이라고 온 부모님의 문자가 저를 울렸습니다.

어머니 : “오늘 우리아들이 우리에게 온 날이네~^^ 참 고마웠네!

엄마를 위로해 주어서! 할머니를 비롯해 모두가 기뻐했지, 너라서~ ”

아버지 : “니가 태어났다는 연락에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새롭네ᆢ”

저라는 존재를 누구보다 기뻐하는 부모님입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부활하셔서 입구를 막고 있던 돌문을 힘차게 굴려내셨던 그때, 주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완전히 죽음을 이긴 승전가를 한시라도 빨리 우리에게 전해주고픈,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삶의 주인이자 부모가 되실 그 기쁜 순간을 빨리 맛보고 싶진 않으셨을까요? ‘나’라는 존재를 마주하고 기뻐했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처럼, 주님도 당신이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올 저를 떠올리시며 기뻐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자녀 키워가며 배워가겠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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