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창39장 묵상)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장관 보디발의 집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던 자식이 종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이 함께 계셨기 때문에 거기서도 형통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형통했다면 노예로 팔리지 않았어야 하지만 형통은 사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도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보고 전권을 맡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따랐습니다.
그 주인의 음란한 아내가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어 완강히 청을 거절했는데 이 일로인해 요셉은 도리어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선하게 살려고 애썼는데 결과는 도리어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감옥에 갇혀버린 상황조차 요셉이 ‘형통’했다고 말합니다. 형통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 하였도다’(105:17)
연단은 요셉이 받은 꿈과 언약의 말씀으로 인해 일어났고 또 그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27:29)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시기 위해 수난을 겪으셔야 했던 것처럼 요셉을 구원자로 세우시기 위해 연단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아들로 세우시기 위해 교정을 받아야 하는 연단도 필연적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는데 이는 나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 자신과 세상에 이루실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고난과 납득하지 못할 일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물러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하나님이 뜻을 이루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