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셨습니다 (43장 묵상)
기근은 더욱 심해갔고 야곱의 자식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다시 애굽에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구원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불편해도 그에게 나아가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베냐민을 요구했기 때문에 지체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베냐민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야곱이었습니다. 나그네 길에서 집착하던 아내의 마지막 혈육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막판에 가서야 야곱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일어났고 또 자식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함을 알았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 사실 그의 집착이 하나님의 일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오늘날도 많은 신자들이 구주를 만나 심판을 면했으니 대충 안주하고 정작 주님께 나오기는 꺼려합니다. 그러나 중생의 씻음은 인정해도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무시하는 것은 근심스러운 태도입니다(딛3:5).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백성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환란과 기근을 만나게 해서라도 주님 앞에 세우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루에 담긴 돈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자 앞에 서기 위해서는 양심과 행실에 어떤 거리낌을 둘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와같이 구원은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빛 가운데 나오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상황 속에 놀랍게도 간증을 잃었던 유다가 주도하여 공동체의 구원의 일정을 주도하였습니다. 베냐민의 생명을 자기가 대신 담보하여 반드시 아버지께 돌려보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생명의 담보가 되셔서 대속하시고 우리를 반드시 아버지 앞으로 이끄시는 주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유다지파로 오신 사실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모형들은 아침 빛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주님은 사람의 실패속에서도 주님 앞에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그들에게 합당한 고백을 받아내고 계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