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사십년 동안이나 하루도 빠짐없이 공급하셨던
만나를 가나안 땅을 밟기 전에 돌연 그치셨습니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는 자는 가나안에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곳에서 성도가
애굽과 광야에서 처럼 주권없는 노예처럼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자유자가 되기위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때문에 율법은 정교하게 사람을 스스로 서도록 제시하고 있습니다. 추수때 밭주인은 모서리는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은 줍지말아야 했습니다.
왜 다 거둔 후 창고에서 나누어 주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철저히 사람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배려하신 자활 장치였습니다.
자립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은총과 배려로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홀로 설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된 프로그램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돕는 자이십니다.
성도는 더 이상 세상과 자신에 대해 노예가 아니라 자유하는 아들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하도록 도와 스스로 서게 하시는 분입니다.
홀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는 결코 더불어 살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이해받는 일과 자기의 입장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자기 문제안에 사람을 끌여들여 소란스럽게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문제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는 것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문제 속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나안이 열리는 곳이 바로 그 곳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