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가르칠 때마다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마음을 갖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 할 리 없건마는
바울은 누구보다 진리의 지식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떨었습니다.
진리가 사람이 이해한 지식과 정보와 체험으로 한정될 수 있다면
이를 증언하는데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진리가 주님
자신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진리가 자기 안에 소유될 수 없기 때문에 가진 겸비함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진리가 자기가 이해하고 제 것처럼 말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섬겨야 할 하나님이라서 떨었던 것입니다.
구원이 사람이 이해한 복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고 주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의 지혜로 설득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진리보다 더 호감을 주는 사람의 지혜를 가장 경계했습니다.
복음의 진리와 십자가의 원리를 안다고 하는 지혜를 경계했습니다.
아무리 영적인 지식과 구속의 원리를 꿰어찬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사람의 이해나 체험으로 받아들여지면 즉시로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되어버리고 ‘내가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을 가졌는가!’ 하고 자랑합니다.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고백을 하여도 한 쪽은 믿음이 복음을 잘
깨달은 사람의 지혜위에 있는 것이고, 다른 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서로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는 쪽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예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이지만 주님 자신을
아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복음은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이라기보다
선포적이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표적입니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는 복음의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여
눈을 치켜 뜬 무리와 복음 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겸손히
복종과 사랑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뒤섞여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