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천국에 대한 보장만으로도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 죽어서 천국을 보장하는
복음이란 보험이상의 의미일 수 없습니다.
죄의 형벌이 두려운 사람에게 용서는
복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세력앞에서 무력하고 죄에 물든
본성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란
공허한 복음일 뿐입니다. 구원이 창조자와 대면과 회복된 관계를
의미한다면 죄란 다름 아닌 그를 등진
삶의 방식과 태도입니다.
보험상품은 이해득실을 따지고
나서 가입하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삶과 가치관으로부터 돌아서고
죄를 미워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들을 따르려면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내어주어야 가능합니다.
복음이 구원을 얻는 쉽고 편한 길로서
믿어져선 안됩니다. 희생과 헌신 없이, 자기부인과 주를 사랑함이
없이도 영원한 운명이 보장되었다는 거짓된
확신에 배부르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복음안에서 주와 관계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까지 자기의
구원을 의심하고 놀라워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너무 커다란 구원의 복 앞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 앞에서 느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맡기신 이름과 은총이 너무
과분해서 생긴 의심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교회에 주신
복이라고 하십니다. 주의 이름 때문에 희생과 댓가를 지불하여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신부에게 주어질
유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헌신 없이 십자가 없이 눈물 없이,
본성대로 욕심대로 믿는 복음을 미워합니다.
주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흔들림 없는 확신을
배격합니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받은 복음은
너무 영광스럽고 대면하는 주님의 낯이
이토록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주앞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천국문 앞에서 거절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왼편 염소들은 확신이 부족해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