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선과 악이란 다름 아닌
자기에게 이것이 좋은가 혹은 싫은가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주님을 처음 영접했을 때에도 서로 좋은 것을
하느라고 관계를 긴장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일보다 먼저 주님 앞에서 경청한 마리아가 칭찬을 받는 듯
했으나 결국 주를 섬기는 일에도 어린 아이의 수준이란 고작
자기에게 좋고 즐거움을 우선순위로 삼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이 주를 섬기는 일조차 이러한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앙이 연륜을 더했어도 이러한 차원에서는 늘 좋고 싫음의 각도에서
일과 사람을 재어보는 미성숙함이 따라다니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의 명분 안에서조차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기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은 자기를 반대해서는 안 되고 심지어
하나님조차 자기를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원래 하나님 뜻과 맞서던 원수였고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신앙 안에서 자기의 원칙이나 경우가 다른 사람과
충돌을 일으키는 일은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숙이란 자기의 원칙과 경우를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접을 수 있는 것이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바꾸어 주의 편에 서는 결단이 진실로 필요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서 그들이 섬기는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발견한 이후로는 그들의 예배와 섬김에서 사람의 언어가 사라졌습니다.
신앙은 자기가 예배하고 섬길 목적이 분명해진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자기에게 좋고 싫음이란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섬김과 관계를 헤아릴 뿐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가치와 존재를 깨뜨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때 비로소 부당한 듯 들렸던 원망의 소리는 잠잠해 졌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의 경우 없는 행동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다리의 맨 아래칸을 귀찮아 하지 말고,
담이 거기 왜 있었는지를 알기까지는 그것을 치우려고
서둘지 말라는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용납 하심으로 받으신 사람들로 세워진 몸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과 다른 다양함을 즐겁게 바라볼 여유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여유는 삶의 여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