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를 기점으로 측량해서 사해까지 허락되었습니다.
사해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땅이요 하나님의 심판이
불로써 집행되어져서 후대의 경계를 준 곳이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사해가 척량의 중심일까요?
그것은 심판으로 시작되고 심판으로 한정되지 않으면
그들은 한 치의 땅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땅이 아무리 아름답고 비옥했어도
주의 백성들은 반드시 이 점을 경계로 삼아야 했습니다.
구원이 심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참된 의와 평안을 갖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침례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담으시고 심판과 저주를
그 위에 부으심으로써 죄인들이 살아나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 주신 은총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들을 사랑하며
죄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믿음의 경계선을 그어가는 것입니다.
의는 다름 아닌 아들 안에 머묾으로 인해 얻게 된 신분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상태가 아무리 흔들려도 받으신 심판으로 인해
이 의는 영원히 안전하다는 무겁고 숙연한 진리를 증거합니다.
반드시 참된 구원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경계선은 그어져 그 측량은 대해와 애굽시내를 돌아
다시 사해까지 왔습니다. 그 종점은 다시 사해였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란 모두 심판 받은 것입니다.
오직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만 기업으로 주어 질 것입니다.
그날은 비할 데 없는 감격과 소망의 날이기도 합니다
아들께서 기업을 보상하시는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들께만 자신을 알리고 묵묵히 섬김의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그날에 받을 기업은 실로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아들로부터 시작되지 못한 신앙과 눈에 보이는 대로 좇은 삶과 아들이 동기가 되지못한 채 벌려 놓은 일들과 계획은 옛날처럼 그날에도 초개처럼 살라질 것이 때문입니다. 심판의 경계선을 아들만큼 잘 아실 분이 없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