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은 구원에는 현저히 다른 두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의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빼놓고는 구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공의롭지 못한 은혜는 불순한 봐주기에 불과하고
은혜롭지 못한 구원이란 심판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공의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반드시 도피성을 두어야 했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로 인해 피의 보복자가 추적할 때 절박한
죄인이 피할 곳을 찾지 못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은 죄인이 어디서든 반나절 거리에 세워졌고
제사장들은 그 길을 늘 보수해 두고 푯말을 정비했습니다.
도피성은 성도가 받은 구원을 적확히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만큼은 죄인이 보호를 받고 레위인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였습니다. 성곽의 크기나 문빗장의 견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죄인의 안전을 보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소위 형제의 피를 갚기 위해 따르던 보수자입니다.
죄인에게 두려운 존재지만 실상 그는 ‘고엘’로 불렸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구속자란 같은 이름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공의와 심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안을 의미하는 도피성을 찾고
피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자가 납득할 만한
공의로운 판결이 내려져야 송사를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변명할 여지도 없는 무서운 것이었지만 도피성문 앞에서 내려진 판결로 더 이상 심판이 집행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공의를 만족시킨 그 안에 안전히 머물도록 하신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요 은총입니다.